카테고리 없음

“후진국도 아니고, 정의연 장부도 없다니” 회계사회 회장 한탄

지은찬 2020. 6. 9. 20:32

 

최중경 한국공인회계사회장은 정의기억연대의 부실 회계 의혹에 대해 “이번 논란을 계기로 연 2억원 이상의 기부를 받는 곳은 정기적으로 외부 감사를 받도록 의무화하는 게 낫다. 그 결과를 보고 기부자들이 계속 지원할지 말지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맞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윤성호 기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정의기억연대(정의연)와 국회의원 당선인 신분이던 윤미향 전 정의연 이사장을 비판하는 첫 기자회견을 가진 지 한 달이 지났다. 정의연 사태는 여성 인권과 한·일 관계, 역사 인식 등 다양한 층위의 문제가 얽혀 있지만 가장 분명한 것은 시민단체의 불투명한 운영 실태를 그대로 드러냈다는 점이다. 정의연의 회계 부실 논란과 비영리단체의 회계 투명성을 담보할 수 있는 해법에 대해 듣고자 최중경(64) 한국공인회계사회장을 만났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기획재정부 1차관을, 2011년 지식경제부 장관을 지낸 최 회장은 2016년 회계사회장 취임 이후 ‘회계가 바로 서야 경제가 바로 선다’는 기치를 내걸고 일련의 회계제도 개혁을 이뤄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공익법인들의 회계 투명도를 평가하는 한국가이드스타의 이사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비영리단체에 대한 회계 감시가 강화돼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다.
“공익 부문, 특히 자선단체처럼 기부금을 받는 곳은 더 투명해야 한다. 기업에 투자하는 건 자기 돈을 불리려 하는 거고, 자선단체 기부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그럼 영리 부문보다 더 큰 설명의 의무가 있는 거다. 우리나라가 G11이나 G12 멤버가 된다고 하고, 방역 시스템이 세계에 알려지면서 국격이 올라갔다고 하지 않나. 이런 즈음에 한국 시민단체가 장부도 제대로 없고, 그게 다 관행이라고 얘기하는 것 자체가 우리는 후진국이라고 선언하는 거다. 기부금 내는 분들은 놀라셨을 거다. 기가 막힌 일이다.”

-앞서 정의연이 회계사회에 검증을 받겠다며 회계기관 추천을 요청했지만 거절했는데.
“정의연에서 의뢰를 받고 내부 검토를 진행 중이었다. 요청이 올 경우 순서대로 지정하는 회원사 리스트가 있다. 워낙 큰 문제니까 큰 곳, 포렌식(forensic·범죄 과학수사)도 가능한 대형 회계법인에 맡겨야 하지 않나 검토했다. 사안의 무게로 봤을 때 내부 순서대로 추천을 할 것이냐, 아니면 이사회 의결을 통해 다르게 정할 것이냐의 문제였다. 그런데 검찰 수사가 시작됐고, 그러면 우리가 개입하면 안 되지 않나.”

-정의연은 지금까지 왜 회계 사각지대였나. 정의연은 자신들이 외부 회계감사 의무 대상이 아니라고 했는데.
“상속증여세법상 총자산이 100억원 이상이거나 기부금 모금액이 20억원 이상이거나 수입이 50억원 이상이거나 등 세 가지 중에 하나라도 해당하면 의무적으로 외부 감사를 받게 돼 있다.”(정의연은 2019년 공시 기준 총자산 23억1853만원, 기부금 모금액 12억487만원, 총수입 12억3647만원이다).

 

 


-그 기준이 적정한가. 기부 문화가 자리잡은 외국은 어떤가.
“영국은 기부금 수입이 1년에 2만5000파운드가 넘는 곳은 회계를 적정하게 하고 있는지 외부에서 체크하게 하고 있다. 25만 파운드를 넘으면 공인회계사에 의한 외부 감사를 받아야 한다. 25만 파운드는 3억8000만원 정도니까, 영국 기준이면 정의연은 당연히 외부 감사를 받아야 하는 경우다. 미국은 주마다 달라서 100만 달러 이상인 곳도 있지만 일리노이주는 2만5000달러(3042만원) 이상으로 정하고 있다. 이런 걸 고려하면 우리도 기준을 낮춰 연간 2억원 이상 기부를 받으면 외부 감사 대상에 포함시켜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감사의 내용도 중요할 텐데.
“초점을 두 가지로 나눠야 한다. 우선 재무적인 측면에서 정확하게, 그리고 투명하게 하고 있느냐를 봐야 한다. 두 번째는 합목적적으로 돈을 쓰고 있느냐를 봐야 한다.”

-합목적적이라 하면 설립 목적에 맞게 썼느냐의 차원인가.
“예를 들어 제가 결식아동 급식 지원을 위한 자선단체를 운영하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 기부금을 받아 직원 월급으로 90%를 쓰고 10%만 어린이들에게 썼다고 하자. 그리고 그대로 재무제표를 썼다. 그럼 기록은 투명하지만 말도 안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공익 감사는 회계 투명성을 체크하는 재무적 감사와 합목적적 지출 테스트를 병행해야 한다. 그렇잖아도 우리 회계사회에서 공익 감사 기준을 만들어 보자고 했는데, 이번 정의연 사태를 보면서 더 이상 늦출 수 없다고 생각했다.”

-외부 감사를 받더라도 사실상 ‘셀프 검증’이 가능했던 것 아닌가. 지난해에야 제동을 거는 장치가 마련됐다고 하는데.
“그동안은 감사인 자유선임제라고 해서, 시민단체가 알아서 회계사를 정하는 ‘셀프 선임’이었다. 자기를 감사할 사람을 자기가 정하는 거니까 재판으로 치면 피고인이 배심원을 정하는 거와 똑같은 거다. 그런데 지난해 상속증여세법 개정으로 비영리 공익법인에 대해 4년은 자유선임을 하고 이후 2년간은 국세청장이 정한 외부 감사에게 감사를 받게 하는 ‘4+2 주기적 감사인 지정제’가 도입됐다. 우리 회계사회에서 아이디어를 낸 획기적인 진전이었다. 회계 투명성을 담보하려면 감사인의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는 지정제가 필요하다.”

-정부가 시민단체 회계를 직접 관리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정부가 그동안 관심을 가졌던 게 아니니까 정부도 자유롭진 않다. 영국은 비영리단체를 감독하는 자선위원회(Charity Commission)라는 정부 기관이 있다. 우리도 행정안전부나 보건복지부, 금융위원회 같은 어느 한 부처가 중심이 돼 공익 부문의 회계 투명성을 높이는 일을 해야 한다.

영세한 시민단체의 경우 외부에 감사를 맡길 여유가 없다. 회계사회 차원에서 공익기부식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지만 정말 어려운 곳은 정부가 비용을 대주면 어떨까. 규모별로 큰 곳은 단체가 직접 감사 비용을 지불하고, 일정 기준 이하는 정부가 지불하거나 회계사회가 지불하거나 혹은 정부와 회계사회, 단체가 나눠서 내고. 공익단체 회계 담당자 교육을 회계사회와 한국가이드스타에서 하고 있는데, 교육과 상담도 확대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이 매긴 회계 투명성 순위에서 우리나라가 63개국 중 61위였다. 왜 이렇게 낮은 건가.
“감사가 잘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0년 주식회사의 외부 감사에 관한 법률(외감법)이 제정되면서 감사인 자유선임이 시작됐다. 아까 설명했던 회사가 자신의 입맛에 맞게 감사인을 고르는 ‘셀프 선임’이 그때부터 가능해진 거다. 당시에는 ‘외국에선 다 회사가 회계사를 선정하는데 왜 우리만 국가가 지정하느냐’는 논리가 통했다. 하지만 외국은 우리나라와 기업 지배구조가 다르지 않나. 소유와 경영이 분리돼 이사회가 집행부를 감시하려고 회계사를 선임하지만 우리는 ‘원 패밀리’가 주주총회와 이사회를 지배하고, 집행부도 그 사람들이 임명하니 결국 누가 회계사를 선임해도 같은 편이 선임하는 게 된다. 이런 부작용이 쌓여 2017년 외감법을 개정했다. 감사인을 6년은 회사가, 3년은 금융위원회 산하 증권선물위원회가 지정하게 됐다. 올해부터 이 ‘6+3 주기적 감사인 지정제’가 전면 도입되니 회계 투명성 순위도 조금씩 좋아지지 않을까 한다.”

-주기적 감사인 지정제와 표준감사시간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든 제도라고 들었다.
“표준감사시간은 기업 규모에 따라 일정 시간 이상을 감사하도록 정한 제도다. 창의적인 제도라고 외국에서도 관심이 많다. 한국인들이 회계에서도 굉장히 창의적이다. 루카 파치올리라는 이탈리아 학자가 15세기에 복식부기를 처음 고안했는데, 우리는 그보다 200년 앞선 고려시대에 ‘송도사개치부법(松都四介治簿法)’이라는 복식부기를 했다. 개성상인들이 창안한 회계체계로 일제 강점기에도 연구를 했고, 서양 학자들도 인용을 했다.”

-2차 재난지원금 제안에 이어 기본소득 논쟁까지 재정 건전성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국가채무 비율이 다른 주요국보다 양호하다는 의견과 한 번 악화되면 재정 여력 복구가 어렵다는 의견이 맞서고 있다.
“연료가 얼마 없는데 동장군을 만났다고 하자. 그러면 얼어 죽지 않을 만큼만 쓰면서 구조대를 기다려야 되는데, 좀 따뜻하게 지내자고 연료를 써 버리면 구조대가 오기 전에 얼어 죽을 수 있다. 97년 IMF 때 함께 위기를 겪었던 인도네시아는 기업들을 외국에 팔아야 했지만 우리는 재정이 건전해 국유화 정책을 쓸 수 있었다. 산업은행을 통해 대우그룹 계열사를 구제해 다시 살려 민간에 불하하는 식으로 우리 산업의 주도권을 외국에 헌납하지 않을 수 있었다. 재정 지원은 상대적으로 경쟁력 있는 산업 기반을 유지하는 것에 첫 번째 목표를 둬야 한다. 코로나19가 끝나고 회복됐을 때 알토란 같은 기업들이 외국인 배를 채우는 걸 원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