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진 와인’ 쉐이퍼, 美 초고가 포도밭 460억에 인수...품질 논란 잠재울까
미국 나파 지역 유명 와이너리 쉐이퍼 빈야드(Shafer Vineyards)가 같은 지역 포도밭 와일드푸트 빈야드를 460억원에 인수하면서 이르면 올해부터 이 포도로 수확한 와인을 맛볼 수 있게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품질 저하로 골머리를 앓던 쉐이퍼 빈야드가 초고가 포도밭 인수로 승부수를 띄웠다고 평가했다. 정용진 부회장이 이끄는 신세계그룹은 해당 와이너리에만 총 3500억원을 쏟아부었다.
평론가 점수가 지속 하락한 쉐이퍼의 품질 논란을 잠재울 수 있을지 주목된다.
12일 와인업계에 따르면 쉐이퍼 빈야드는 지난해 3500만달러(약 457억원)을 들여 현재 와이너리 인근에 최상급 포도밭 22에이커(약 2만7000평)를 더 사들였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처럼 포도밭이 이미 여러 갈래로 잘게 쪼개진 국가에서 중소규모 와이너리가 작은 포도밭을 사고 파는 사례는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땅덩이가 넓고, 운영 자금 규모가 큰 캘리포니아 와인 업계에서 이 정도 대규모 포도밭 인수 사례는 일년 단위로 찾아봐도 몇차례 벌어지지 않는다. 쉐이퍼 빈야드로선 신세계(194,000원 ▼ 1,200 -0.61%)그룹 인수 이후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과감하게 확장을 결정한 셈이다.
정용진 부회장이 이끄는 신세계그룹 계열 부동산 개발사 신세계프라퍼티는 지난해 2월 2억5000만달러(약 3000억원)를 들여 이 와이너리를 야심차게 인수했다. 여기에 이번에 투자한 460억원을 합치면 지난 1년 동안 쉐이퍼 빈야드에 쏟아부은 자금은 3500억원에 달한다.
쉐이퍼 빈야드는 현재 나파 인근에 가진 포도밭을 전부 합쳐 240에이커(약 29만평) 정도를 가지고 있다. 이번에 산 22에이커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포도밭에 비하면 10% 수준이다.
전체 비중은 적지만, 가격은 만만치 않다. 공신력 있는 나파지역 와인 전문 부동산 기업 뱅트루에 따르면 미국 최고 와인 산지이자 초고가(超高價) 와인이 즐비한 캘리포니아에서 최고 등급 포도밭은 1에이커(약 1200평)당 보통 50만달러(약 6억5000만원) 수준에 팔린다.
하지만 쉐이퍼가 사들인 포도밭은 1에이커당 평균 시세 3배가 넘는 160만달러(약 21억원) 수준이다. 그만큼 비싸고, 좋은 평가를 받는 포도밭이라는 방증이다.
이번에 쉐이퍼 빈야드가 사들인 포도밭 이름은 ‘와일드푸트 빈야드’다. 세계적인 와인 산지는 작은 규모 포도밭에도 개성을 드러내기 위해 따로 이름을 붙인다.

쉐이퍼 빈야드에 이 밭을 넘긴 옛주인은 앨리 장 필립스(Arlie Jean Phillips)라는 와이너리 경영자다.
그는 미국을 넘어 세계 최고 컬트와인(놀랄 만한 맛과 구하기 힘들 만큼 적은 생산량으로 열광적인 추종자를 거느린 와인)으로 꼽히는 스크리밍 이글(Screaming Eagle)을 만든 장본인이다. 스크리밍 이글은 현재 750밀리리터(ml) 1병에 600만원이 넘는 초고가 와인이다.
아버지와 함께 쉐이퍼 빈야드를 세계적인 와이너리로 키운 덕 쉐이퍼는 이 밭에서 키운 포도를 맛보고 항상 “매우 특별하다”며 눈독을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제이크 왓슨 쉐이퍼 세일즈 디렉터는 조선비즈와 인터뷰에서 “캘리포니아에서도 유명한 밭이기 때문에 가격이 비싸다는 것을 알면서도, 와인 품질을 고려한 전략적인 차원에서 이 밭을 구입했다”며 “정확히 어느 등급부터 이 포도밭에서 키운 포도를 쓰겠다는 결정은 내리지 않았지만, 올해 만드는 고급 와인에는 이 밭에서 수확한 포도가 들어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보통 미국에서는 7월부터 포도를 수확하기 시작한다. 이르면 바로 다음 달부터 이번에 새로 산 와일드푸트 빈야드에서도 포도 따기에 나설 예정이다.
이 밭에서는 주로 나파밸리가 자랑하는 간판 레드와인 품종 카베르네 소비뇽을 키운다. 여기에 복합적인 맛과 향을 더하기 위해 카베르네 프랑과 메를로 품종 포도 묘목을 일부 심었다고 왓슨 디렉터는 덧붙였다.
쉐이퍼 빈야드 역시 핵심 와인은 카베르네 소비뇽 품종을 이용해 빚는다. 이 제품들은 최근 평단에서 평가가 오락가락해 쉐이퍼 빈야드 양조팀이 골치를 썩었다.
평론가 점수는 와인이 가진 절대적인 가치를 나타내는 척도가 아니다. 하지만 가격대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와이너리에는 단순한 명예를 넘어 자금 회전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가령 쉐이퍼 빈야드 대표 와인 가운데 하나인 ‘TD-9′은 출시 초기 90점 중반을 꾸준히 넘나들던 평단 점수가 최근 90점 초반대로 낮아졌다.
이 와인은 쉐이퍼 빈야드가 내놓는 최고등급 와인은 아니다.
하지만 가장 많이 만들고, 가장 많이 팔리는 레드 와인에 속한다. 가격적인 측면에서 봐도 쉐이퍼 빈야드를 대표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TD-9은 미국 내 현지 가격이 세금 포함 75달러(약 9만7000원) 수준인 프리미엄 와인이다. 미국 와인 시장에서는 보통 50달러를 넘는 와인을 프리미엄 와인으로 구분한다. 국내 판매 가격은 17만4000원이다.

와인은 포도라는 농작물로 만든다. 자연스럽게 포도를 키운 그 해 환경 변화가 품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여느해보다 흉년이었던 때 만든 와인은 평단에서 박한 평가를 받고, 여느해보다 풍년이었을 때는 반대로 높은 점수를 받는 경향이 뚜렷하다.
하지만 TD-9은 이런 환경 변화와 상관없이 꾸준히 이전보다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와인 대통령’으로 불리는 로버트 파커는 2016년 TD-9에 94점을 줬다가, 2018년 91점으로 점수를 낮췄다. 2019년에도 TD-9은 91점에 그쳤다.
2018년과 2019년은 미국 와인업계, 특히 나파 인근 포도 농사가 역사적인 풍년을 기록했을 시점이다. 유명 와인매체 와인스펙테이터는 2018년과 2019년 아브레우와 콜긴 같은 쉐이퍼 빈야드 인근 와이너리에 최고 점수를 줬다.
와인 전문가들은 이런 점을 감안해 이번 포도밭 인수가 품질 저하로 골머리를 앓던 쉐이퍼 빈야드가 띄운 승부수라고 평가했다.
시세보다 높은 값을 주고서라도 좋은 포도가 자라는 밭을 사들일만큼, 브랜드 경쟁력을 높여야 할 필요가 커졌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와인 시장은 신세계그룹이 쉐이퍼 빈야드를 사들였던 지난해 상반기까지만 해도 고속 성장을 거듭했다.
그러나 팬데믹이 엔데믹으로 접어든 하반기 이후부터 급격히 움츠러 들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 쉐이퍼 빈야드를 수입·유통하는 신세계그룹 계열 주류 전문 수입사 신세계엘앤비는 지난해 매출액이 2021년보다 3.15% 늘었지만, 영업이익은 45% 가량 줄었다. 순이익 역시 66억원으로 57% 감소했다.
전반적인 시장이 위축하는 가운데, 줄어드는 파이를 놓고 미국 와인 브랜드가 우리나라에서 펼치는 경쟁은 갈수록 격해지고 있다.
유통맞수 롯데칠성(139,900원 ▲ 400 0.29%)음료는 미국 최대 와인그룹 E&J갤로와 함께 루이스 엠 마티니, 오린 스위프트 같은 캘리포니아 주요 와인 브랜드를 롯데마트 같은 주요 유통 채널에 지금보다 더 저렴하게, 대량으로 공급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이미 국내 오린 스위프트 판매량은 2018년부터 2022년 사이 9배 가까이 늘었다.
최근 코스닥 시장에 상장한 나라셀라(21,550원 ▼ 1,050 -4.65%) 역시 로코야, 케이머스, 파니엔테, 할란 이스테이트 같은 내로라하는 최고급 미국 와인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다. 나라셀라는 공모 자금을 와인 포트폴리오 확대에 쓰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신세계엘앤비 관계자는 “상품 매입과 관해 포도밭 추가 구입이 우리나라 판매가격 인상과 이어지지 않도록 신경 쓸 예정”이라며 “면세점 같은 여러 채널에서 관련 마케팅을 강화하는 방안도 생각 중”이라고 말했다.